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제작 완료!


현재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판매하고 있습니다.
농협 939 12 381760 박인주 로 50000을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희망을 위한 찬가 별책 2도 판매하는데, 별책만 구입하시면 5000원, 둘다 구매하시면 53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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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일상

1.드래곤에이지가 나왔다! 스팟에서의 평점은 9.3으로 발더스 이상이다. 유저 평점은 한층 높음. 오오오오오오오. 하고 싶다. 문제는 사양크리. 그렇지 않아도 에뮬도 안 돌아가고, 업글해야 하나~ 하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할까. 으음. 모든 지름신은 이런 방식으로 찾아오기 마련이지. 
판권료가 쎄서 d&d 세계관과 연을 끊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비싸게 받아먹으려 들었던가...  아니면 발더스의 성공 때문에 바이오웨어가 쉽게 거절 못하리라 생각해 무리수를 둔 걸까. 어느 쪽이든 아쉬운 일이긴 하다. 
2.모군이 추천한 소설을 찾으러 돌아다녀 봤다. 보이지 않았다. 시간낭비했다.(...)

3.슬슬 투표로 제작방식에 대해 결정해야 겠다. 까놓고 말해 맘만 먹으면 올해 내에 완결볼 수 있다. 그만큼 거의 다 짜여진 글이라서. 댓글회수 등을 위해 일부러 빠른 연재는 안 하고 있음. 결정해야 할 사할은 별건 없고, 이 정도. 

양장본과 일반본.(남아버아 포함) 
삽화는 책내 삽입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따로 작은 책으로 하나 만들까.(인쇄소에서 이쪽이 싸다고 추천)

읽기는 일반본이 뒹굴거리며 읽기 좋지만 양장본이 뽀내 잡기에 더 좋다. 다들 읽고 사는 거라서, 아마도 이번 역시 양장본으로 결정되지 않을까 함. 삽화는 그림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의외로 존재자체를 싫어하는 이들도 있긴 한데, 그런 이들을 위한 선택이다. 다만 이왕 넣는다면 장면에 맞춰 넣는게 좋기 때문에 이 역시 고민되는 문제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할 밖에. 

4.개인적으로 이번에도 포항공대와 카이스트가 가장 많은 신청배달 지역일지가 작은 관심사다. 희망찬도 그랬고, 클라우스도 그랬음. 언젠가 새매님에게 다들 기숙사를 떠나지 않고 살아서 그렇다는 이야길 듣긴 했는데... 공대가 빡세긴 하지만 대한민국 공대가 저기 뿐인건 아닌데 유독 저 두 곳이 눈에 띈다. 공대로 배달해 달라는 이야기는 저 두곳을 제하면 없다시피 하다. 클라우스는 저기 제외하면 서울대 뿐이었던가. 뭐랄까 이건 그 대학문화 자체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현상이 반복되면 두 학교는 장르소설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로 잠정 결론 내려도 좋지 않을까? 더 정확한 추론은 '우연'일 수도 있긴 하지만.(일반화 하기엔 예가 너무 작기 때문에)

잡담.

1.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읽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며 내가 어째서 쿤데라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매혹적인 사유와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다. 커튼도 그러했지만, 줄긋고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다. 다들 읽어보길 추천.

2.책읽기 보고를 하지 않은지 좀 됐다. 소개할 것들은 많이 쌓여 있는데, 소개해도 보는 이들도 얼마 없는 것 같고 해서 게으르게 굴었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정리하긴 해야 하는데. 짤막하게라도 정리해 두는게 읽은 것을 남기는데 큰 도움이 된다. 독서 후에는 인상기라도 좋으니 짧게나마 이해한 것을 적어남기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자. 

3.글쓰기에는 개인적인 스타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가 공유하는 특정한 스타일이란게 있다. 시대 뿐만이 아니라 계층이나 영역따위에 따라서도 나뉜다. 가령 인터넷에서만 쓰이는 언어적인 표현이나 문체 같은 것들도 있고,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것들, 지식인들 사이에서 쓰이는 것들 뭐 특정한 문화영역에서 쓰이는 것들... 따지고 보면 굉장히 다양하다. 이런 기준을 따라 요즘 이른바 인텔리 계층에서 눈에 띄게 유행하고 있는 표현은 '그'다. 그러니까, '그녀'를 사용하지 않고 '그'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풍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라는 표현 자체가 이광수가 영어소설을 번역하며 she에 대응하는 표현이 없어 만들어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제 사실 표준어나 다름없게 된 표현이라 다시 '그'로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를 쓰냐, 그녀를 쓰냐에 따라 같은 문장도 느낌이 꽤 다르다. 심지어 거기 쓰인 '그'가 여성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한번쯤 시험해 보시라. 문체를 즐긴다는 것은 저런 미묘함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4.쿤데라에 대한 독서의욕을 증진하기 위한 간단 발췌.
...해를 거듭하면서 소설은 그 나름의 방식과 고유의 논리에 따라 존재의 상이한 면모들을 찾아내었다. 세르반테스의 동시대인들과 더불어 소설은 모험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사뮤엘 리처드슨과 더불어 소설은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검토하기 시작하고, 감정의 은밀한 삶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발자크와 더불어 그것은 역사에 뿌리내리는 인간을 발견한다. 플로베르와 함께 그것은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일상의 지평을 탐사한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그것은 사람들의 결정과 행위에 끼어드는 비합리적인 것의 개입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또 시간을 탐색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더불어 그것은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을, 제임스 조이스와는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시간을 탐색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과 더불어서는 시간의 바닥으로부터 유래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원격조정하는 신화의 역할을 묻는다... 
간명하면서도 탁월하게 근대소설들이 해온 작업들을 요약하고 있다. 놀라운 이해가 아닌가. 그러니까 읽도록 하자!


잡담 일상

1.역시 한 번 해 봤더니 훨씬 쉬워지는군요. 싸인은 금세 해결했습니다. 책은 굉장히 예쁘게 만들어져서,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보시면 크게 만족하실 겁니다. 굉장히 품격있게 만들어졌지요. 여분이여 팔려라! 그나저나 과연 한국은 일일생활권. 하루만에 일다보고 내려올 수가 있군요. 발도 아팠는데도. 음!
2.헌재의 판결문이 화재더군요. 병맛이 넘쳐서 과연 화제가 될만 했습니다. 입법부를 존중하는 태도라 하던데, 그렇다면 지들이 판정까지 내리면 안 되겠죠. 하여간 이번 사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과거 미국 정치제도 공부할때 중요하게 떠올랐던 대법원 문제가 생각났습니다. 한국이 요새 잘 보여주듯, 미국은 이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대법원이 판결을 해 결론지어 향후 수십년간의 정치적 문제의 방향을 결정지은 것들이 드물지 않지요. 이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국가지배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연대'외에는 답이 없는지라 지금은 속수무책입니다. 
3.잃어버린 이름이 신청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2부도 안정적으로 적고, 이 실적으로 선생님들도 좀 꼬셔서 뭔가 해 볼 수 있으면 좋기도 하겠고. 사실 인문학을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라던가, 이런 문제에 대해 요즘 다들 관심이 많긴 한데 클레멘트 코스라던가, 논술시장을 장악한다던가(...) 외에는 답이 없는게 현실이라. 
4.그렇지만 역시 까놓고 말해 학문의 본령은 전문가주의이기 때문에 빡샌 공부도 열심히 해야...
5.3번에 연결해서 희망찬을 읽고 오는 독자분들의 이야기 가운데 논술을 좋은 성적을 받아 원하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종류의 감사 편지가 좀 됩니다. 이런 편지를 받으면 기쁘지만 약간은 뒤가 캥기기도 합니다. 학벌이념 같은걸 부정하는 글인데, 일조한게 아닌가 싶어서. 물론 그 글을 읽어 도움이 된 부분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희망을 말하자면 저는 이왕이면 그 분들이 그 글이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들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여 장래 책임감있는 엘리트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다~ 고 여깁니다. 

잡담 일상

1.이른바 환빠는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까이지만, 의외로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이들에게도 드물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역사 같은 것에 별 관심도 없고, 인터넷도 잘 안하는 사람이 역사에 대해 환빠적인 의견을 다소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민족주의적 열광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야사나 재미있는 상식 정도로 알고 있기도 하고. 역사공부가 병신 취급을 받다보니 사람들이 역사관련 지식을 찾아도 주로 흥미로운 것만 찾고, 그러다 보니 사실은 한국이 킹왕짱이었다는 헛소리에 경도되는 자연스러운 막장화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개인적으로 환빠는 민족주의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 만큼 비판하는 측에서 나치니 뭐니 하는 과장된 예를 들먹이는 만큼 우려하진 않지만,(진심으로 그런 미친 생각을 하는 자들은 있겠으나 그들의 민족주의적 정복욕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인 힘을 현재 한국에서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게 엄청난 국제적 망신거리이자 관련국 시민들에게 혐한감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우려거리가 된다고 여긴다. 이런 풍조가 근절되지 않고 지속되다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게 되면 터무니없는 파멸적 민족주의의 도화선 정도도 될 수 있기도 하겠지만, 후자의 경우 그런거야 환빠가 없더라도 다른 무언가를 내세울테니 결론적으로 환빠의 영향력이란 심대한 집안망신의 원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2.개인적으로 환단고기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고딩 정도였는데, 현재 내가 글을 연재하고 있는 문피아 사이트의 제작자인 금강 작가의 몇 민족주의적 소설을 보았던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당시에는 놀라워하며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곧 시들해졌다. 계속 이야기를 찾아나가다 보니 믿을만한 이야기가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고, 우리 민족이 예전에 얼마나 잘났었니 하는 문제에 관심이 사라지기도 했었기 때문이다.(계급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다만, 환단고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자체는 무어라 비판하기 힘들고 여긴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시중에 나온 책들을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상호검토하며 판단하라 하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이고, 윗글에서도 적었듯 사실은 잘난 우리 민족이란 참으로 매혹적인 이야기다. 가능하면 믿고 싶어지는게 당연하지. 소고기 파동 당시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넷에서 사람들이 광우병에 대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했다며 그들을 멍청이 취급하는 잘난 과학 전공자를 보기도 했는데, 참 추악한 꼴이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거치지 않은 이들이 잘못된 정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역사공부가 시간낭비 취급을 받는 현실에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안목 같은걸 사람들이 가지리라 기대하긴 힘들다. 비전공자에게 일단 책으로 나오고, 교수가 적었거나 그 저자가 그럴듯한 학위가 있다고 하면, 다 비슷한 수준으로 보일뿐, 엄격하게 그 급을 나누긴 힘든 것이다. 그러니 환빠적인 의견을 가졌다 해도 탓할 일만은 아니니 설명, 설득은 하되 병신 취급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자. 

3.민족주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기념삼아 한 구절 발췌. 영어 공부겸 해석해 봅시다. 
though usually aiming at a mass following, its(파시즘) potential strength was reckoned not by 
the numbers of its adherents but by the influence of the person in high position whose good 
will the fascist leaders possessed, and whose influence in the community could be counted 
upon to shelter them from the consequences of an abortive revolt, thus taking the risks out of 
revolution.


잡담 기타

1.디스트릭트를 봤다. 이 영화는 새롭지 않다. 불법이민이나 인종차별에서 비롯되는 인권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도 드물지 않다.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반성하게 되는 주인공도 드물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잔임함과 욕망이라는 것도 드물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하다면, 그것은 새로이 마련한 의장의 힘에 있다. 단선적인 이야기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면서 외계인이라는(이것은 이질적이고 무서운 저들에 대한 극단화된 메타포다.) 소재를 통해 사실은 우리가 우리에게 행하고 있는 폭력을 매우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훌륭하다. 적지 않은 이들이 후속편을 바라는 모양이던데,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한 번도 타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2.슈로대를 하다보면 자주 생각하게 되는 건데, 이 캐릭터와 전투 시스템을 사용해 자유도 높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하나가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니까 삼국지와 엑스컴, 그리고 대번장의 시스템을 적절히 뒤섞어서, 주인공 일행은 거점에서 닥터헬이라던가~ 여러 적대 세력의 공세에서 지구의 각 지역을 지켜나가고, 그 성과에 따른 보수를 받아 개조 따위를 하고, 캐릭터도 성장시키고, 그리고 일정한 지역이벤트 따위를 클리어하면 동료로 새로운 로봇과 캐릭터가 입수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캐릭터는 개인 이벤트와 캐릭터들 간에 엮어진 이벤트 따위가 마련되어 짤막한 자기 이야기 따위도 조건을 충족하면서 진행시킬 수 있게 되고. 이야기 진행 자체는 엑스컴이 그했던 것 처럼 특정한 지역이나 적 캐릭터를 격파하면 한 단계씩 진행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겠다. 그야말로 슈로대 + 엑스컴 + 대악사가 되겠군. 그리고...
음, 이런 망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저런게 나올리가 없으니. 게임은 소설과 달리 자가발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반다이에서 언젠가 이런거 하나쯤 만들어주면 좋을텐데!! 기획 같은 거라도 없을까? 하기야 게임 자체가 굉장히 만들기 어려울테니 굳이 시도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만일 나오면 그야말로 블랙홀 같은 게임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나오면 나오는 대로 곤란하겠군. ㅋ

3.해운대는 재미없는 영화였다. 자그마한 사건들도 충실하게 잊지 않고 사용해 전체적인 이야기를 얽어내었다는 것은 높게 평가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결여하고 있는 미덕인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병신같다. 인간 간의 갈등을 재난이라는 더 큰 갈등으로 묻어버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영화가 보여주는 갈등의 해결을 진짜 해결이라 볼 수가 없는 탓이다. 본디 살아감에 있어 대부분의 갈등은 해소되기 보다 참고 묻어두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잖아?

4.매드맥스2를 봤다. 오오 폴아웃. 이 영화가 보여준 황량한 세계의 모습은 당시에 적지 않은 충격을 전세계에 던졌다고 한다. 걸작 중의 걸작인 폴아웃이나, 전설 북두신권도 이 작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격하고 보게 된 소감은 도통... 역시 시간이란 무서운 모양이다. 당시에는 그렇게나 뛰어났던 작품이 지금 보자니 여러가지로 부족하다. 이 작품은 아마도 작품 자체라기 보다 그 영향력이 더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고보면 매카시의 '더 로드'도 이 작품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려나. 아니, 매카시야 어느 작품이고 간에 세계관이 좀 막장이었으니...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 말이 떠올랐다. war, war never changes. 


보고 일상

1.토요일날 하려던 모임은 참석예정자 여러분이 줄줄이 파토가 난데 더해, 저 역시 인쇄소에서 이번주내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로, 같이 파토가 났습니다. *^^*...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뭐 머지 않아 잃어버린 이름도 있고 말이지요. 부디 한 천 오백질쯤.(...)

2.드물지 않게, 음악이란 기이하다고 느낍니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정리되는 것 중 음악이 가장 이질적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인간의 감각적 쾌락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역시 예술이란 영역에 발붙이고 있긴 하지만, 다른 종류의 예술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들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예술이란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것중 가장 돌출적이라 여깁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음악, 음으로만 이루어진 기하음악은 이른바 '해석'이라는 문제에 앞에서 가장 그 탁월함을 가늠하기가 힘이 듭니다.
양식상의 변천과 발전이란 것이 음악의 영역에서 물론 있긴 했지만, 그러한 발전은 문학과 달리 거기 인간적인 해석이나 의미같은 것들이 들어설 틈이 그다지 없었습니다. 신난다, 혹은 슬프다 같은 즉물적인 성격을 가지는 음악적 특징을 가지는 표현군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러한 표현이 확장되어 특정한 이념이나 인간을 상징하지는 못하지요. 그러한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가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사는 시의 영역에 오롯하게 포함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수한 음악의 역사는 도리어 수학이 발전하는 것 처럼 새로운 기법이 발견되고 발전해 온 것에 가까웠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음악은 수학과 매우 친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의 구현이 철저하게 수학적 비례의 결과라는 것 부터) 감각적 쾌락에 봉사한다는 지점을 제외하고, '특정한 공리의 집합 위에서 논리적인 질서의 구현하는 행위'를 음악의 핵심적인 정의라 한다면, 음악과 이 정의를 가장 많이 공유하는 것은 수학이지 예술이 아니게 됩니다.
심지어,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음악은 물리학을 비롯한 제과학보다도 수학에 가까워 집니다.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 영역에서 이론적으로 예측되는 실험결과가 실제로 딱 비근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행성의 운행처럼 큰 것을 다루는게 아니라면 드물다고 하는데, 음악의 경우는 악보 그대로 연주자가 연주해 내는 것이 당연한 영역인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렇게 되는 것은 수학과 음악이 그만큼 흡사하게 추상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음표를 작성하고 연주하는데 변수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수학과 과학은, 마찬가지로 매우 어린 천재들이 그 압도적인 재능으로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경험을 통해 많은 변수를 함께 고려하지 않아도 좋은, 단순한 규칙이 반복적으로 쌓이며 확장되어 만들어내는 질서의 구현이라면, 재능으로도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할테니까요. 이러한 논리는 정확하게 체스나 바둑과 같은 것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예들을 보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하게 추상적인 영역에 대해, 우리는 좋다거나 싫다 이상의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영역에 대해 무언가 의미를 부여한다면, 좋다, 싫다. 라는 항과, 진부하다, 신선하다라는 항을 교차에 얽어 평가하는게 최선인 영역이 되는게 아닐까요. 그 이상의 의미를 사실 부여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제가 음악을 잘 몰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음악이 가지는 강력한 추상성을 생각하면 이런 것들을 연관해 생각하게 됩니다.

3.음악을 제외한 인문학 영역에서 어린 천재가 판세를 바꾸어 버린 일은 없다시피 합니다. 그나마 거기에 가까운 것이 니체로, 그는 20대에 철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걸작을 써낸 괴물입니다. 바로 '비극의 탄생'이지요. 그러고보니 이것도 음악에 대한 책인데... 그리스 비극에 있어 코러스의 의미를 분석해낸 획기적인 책임. 그리스 문화의 디오니소스적인(싸이코틱한) 면을 파괴했다고 소포클레스 이후로 니체가 되게 까기도 했지요. 굳이 확장을 하자면 도덕경 주해로 유명했다던 왕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보고에 겹친 뻘글 끝.

책 인쇄 이야기.

1.책을 만드는데 삽화 비율이 맞추기 어려워서 결국에는 길게 인쇄해서 접어넣는 방식으로 했다. 덕분에 제본비는 한층 업.(...) 적자폭이 더 커졌다. 여분 안 팔리면 좆ㅋ망ㅋ
2.모임은 토요일에 가질 예정입니다. 시간은 저녁 7시 경이 어떨까 함. 저는 그때 을지로에 있을 예정입니다.

잡담

1.인쇄소와 계약을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뭐 계약이라고 해도 계약금 넘기고 나머진 메일 올리고 그런 것이었지만. 책은 곧 찍여져 나올 것이다. 거의 일년에 딱 맞춰진 작업이었다. 길었군. 끝까지 300명을 모으지 못한 것은 아쉽다. 좋은 글이었는데. 약간 손해를 봤지만 그건 여분을 팔아서 메우는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진행된 고로, 싸인을 첨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 더불어서 이번 주말에 모임을 가져야 할 텐데.... 지리 등을 잘 아는 분은 좋은 장소 추천 좀. 애매하면 인쇄소 근처에서 할까.

2.반전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로는 일이 닥칠 때까지 감상자에게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 것. 두 번째는 감상자에게 거짓 정보를 주는 것. 세 번째로는 불명확하게 계속해서 단서를 흘리는 것이다.
이 중 첫번째는 흉악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반전이랍시고 갑툭튀하는 꼴을 보게 되면 오만정이 다 떨어진다. 물론 어릴 때는 그런데도 감격하고 흥분할 수 있지만, 대가리 좀 커지면 저런 반전을 반전이랍시고 내어 놓으면 창작자의 실력에 대한 신뢰는 무저갱 저쪽으로 추락한다. 미학적이 것은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가져 보편적일 수 있지만, 그보다도 거대한 의외성이 그 보편적인 사소함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그 연결고리 없는 일탈, 의외성은 그저 망상이다. 근데 의외로 이짓하고도 반전이 최고니 운운되는 어처구니 없는 물건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두 번째는, 그것만 사용할 경우 1번 이상으로 어이없는 꼴이 된다. 대표적으로 '아씨발꿈'이 있다. 그것은 작의 전체진행을 거짓정보로서 주고 결말에 꿈이었다고 진짜 정보를 전달하는 반전의 형식인데... 이거 쓰고 욕을 안 먹는 물건은 구운몽하고 호접지몽 빼면 없다고 봐도 좋겠다. 쓰지마라.
세 번째는, 그들 암시가 복선으로 작동해 반전이 부드럽게 연출되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 제공으로 인해 의외성이 박살나는 경우가 많다. 의외성을 노린다면 암시를 통해 단서를 흘리는 데는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 한다. 특히 여러 사람이 보면 그걸 보고 맞추는 사람이 한 사람 쯤은 분명히 나오기 때문에 (심지어 1번이나 2번으로 반전이랍시고 마련된 것들도 간파당하곤 한다! 오오 찍기는 기적을 만든다능.) 조심하는게 필수다.
때문에 반전을 누군가 사용하고자 할때 미학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방법은 2번과 3번을 겹쳐 사용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단서를 흘리면서 그 단서를 왜곡해서 전달해 눈치채지 못하도록, 더 강하게는 다른 종류의 예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 반전이 드러나는 순간, 그 단서들의 진정한 모습 역시 함께 드러나도록 하면 금상첨화다.
아, 제가 그러고 있단 얘기는 아닙니다. ㄳ

쿤데라 읽기.


쿤데라 이야기를 과거 포스팅에서 언급했다. 요즘에는 그의 다른 소설 중 하나인 생은 다른 곳에를 읽고 있기도 하다. 그런 고로, 이 글을 소개해 본다. '신형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말로 찬사를 받는 중 이제 '몰락의 에티카'로 한권의 평론집을 낸 신형철씨의 글이다. 

이중 자기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욕망을 벗어날 때, 소설가는 소설가가 된다는 쿤데라의 말은 진실이다. 바흐친의 논리를 빌리자면, 그때에야만 진정으로 소설은 다성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쿤데라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때에 소설은 정말로 딱 할 말만을 하고서도 '뷔페'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시사IN(08. 09. 05) ‘先해석’의 커튼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

밀란 쿤데라(1929~)는 <농담>(1967)에서 <향수>(2000, 원제:무지)에 이르는 10여 권의 작품을 쓴 소설가이지만 통찰력 넘치는 고급 에세이의 필자이기도 하다. 체코어로 쓴 초기작까지 포함하면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에세이집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인 <소설의 기술>(1985, 국역본 1990)과 <배반당한 유언>(1992, 국역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1994)은 이미 국내에 소개됐다. 앞의 책이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재출간을 거듭하는 모습과 뒤의 책이 엉뚱한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절판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에세이집을 고대했다. 기다리던 그 책, <커튼>(2005, 국역본 2008)이 나왔다.      



우리는 왜 그의 에세이를 아끼는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통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 통찰은 “소설만이 발견하고 말할 수 있는 것”(101쪽)에 대한 깐깐한 사색으로 이어지고, 이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왜 진짜 소설인가’를 입증하기 위한 노련한 변호가 된다. 그 변호의 방법론은 “나름의 사적인 소설사”(92쪽) 만들기이다. 그의 에세이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면 우리는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라는 위대한 선구자에서 시작해 18세기의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과 19세기의 플로베르 등을 거쳐 20세기 초의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브로흐 등을 지나 20세기 중반 폴란드의 곰브로비치를 찍고 밀란 쿤데라 자신에 이르는 하나의 소설사를 얻게 된다(모든 위대한 작가는 자기만의 문학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인가?

서정성의 덫에서 벗어나야 ‘진짜 소설가’

그에 따르면 ‘진짜’ 소설가는 서정성의 덫에서 벗어날 때 탄생한다.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는 시기, 자신의 고유한 영혼에 대해 말하려는 욕망에 들려 있는 시기가 바로 “서정적 시기”다. “반(反)서정주의로의 개종은 소설가의 이력서라면 반드시 들어 있는 기본 항목이다.”(124쪽) 개종 이후 숙고해야 할 것은 “나는 항상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고자 했다”(86쪽)라는 플로베르의 말이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은 곧 비도덕적이다.”(87쪽) 뒤집어 말하면,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소설의 임무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의 모더니즘과 더불어 소설은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선 사실로서의 역사로부터 독립했다. 소설가가 관심을 갖는 역사는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실존의) 뜻밖의 가능성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97쪽)일 뿐이다. 문제는 역사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실존의 수수께끼이므로, 필요하다면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적 개연성도 포기해야 한다. 예컨대 카프카가 그랬다. “카프카가 경계를 뛰어넘은 이후로 비개연성의 국경은 경찰도 세관도 없이 영원히 열려 있다.”(102쪽) 

그 실존의 수수께끼를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헤르만 브로흐와 로베르트 무질의 “생각하는 소설”(98쪽)이 그 대답이 된다. 그들은 과학이나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색을 소설 속에 통합하는 것, 그리고 아름답고 음악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작품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99쪽) 작업을 해냈다. 이 여담(餘談, digression)의 글쓰기를 통해 소설은 ‘소금장수 이야기’를 넘어서고, 결코 영화가 병합할 수 없는 소설만의 고유한 영토를 얻는다(그 자신 분개하며 말한 대로, <프라하의 봄>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전혀 별개의 두 예술이다). 바로 이것이 밀란 쿤데라 소설의 가장 매혹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가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21쪽)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선(先)해석의 커튼”(127쪽)을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나이 이제 팔순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일의 가치에 대한 변함없는 이 확신과 애정! 그러고 보면 이 해박하고 우아하고 유쾌한 할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ps.이 책을 읽고 나면 브로흐의 <몽유병자들>(1932-)과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1930-)를 읽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전자는 다행히 작년 말에 새 번역본이 나왔으나, 후자는 그간 번역된 바 없고 여전히 별무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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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라는 칼은 날카로워야 제 구실을 하는 법이니 숫돌처럼 딱딱한 책에 갈아야 한다. - 강유원